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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회 전 솔/ 영어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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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의 해방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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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주의자로서의 아버지는 제법 근사할 때도 있었으나 농부로서의 아버지는 젬병이었다.‘
’시원이라니. 국졸 아버지 입에서 방언처럼 터져나온 고급 어휘에 나는 실소를 금치 못했다.‘
’살아생전 꽃 따위 쳐다보지도 않았던 아버지였다.‘
’아니다. 생각해보니. 가을 녘 아버지 지게에는 다래나 으름 말고도 빨갛게 익은 맹감이 서너가지 꽃혀 있곤 했다. 연자줏빛 들국화 몇송이가 아버지 겨드랑이 부근에서 수줍게 고개를 까닥인 때도 있었다. 먹지도 못할 맹감이나 들국화를 꺾을 때 아버지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뼛속까지 사회주의자인 아버지도 그것들을 보고 있노라면 바위처럼 굳건한 마음 한가닥이 말랑말랑 녹아들어 오래 전의 풋사랑 같은 것이 흘러넘쳤을지 모른다는 데 생각이 미치자 아버지 숨이 끊기고 처음으로 핑 눈물이 돌았다. 사회주의자 아닌 아버지를 나는 알지 못한다. 그러니까 나는 아버지를 안다고는 할 수 없는 것이다. 나오려던 눈물이 쏙 들어갔다.‘
’평생 그 이상의 돈을 써본 적이 없는 경험의 증거일까, 아니면 치매에 걸려서도 자식의 삶을 불안해하는 증거일까. 아버지는 난생처음, 자식에게 돈을 요구했다. 고작 삼만원을.‘
어렸을 때는 찬란했던 아버지의 젊음을 기억하지 못하고, 머리가 좀 굵어지고 나서는 학업에, 사회생활에 바쁘다는 이유로 아버지의 삶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다가, 어느날 문득 아버지의 모습에 시간이 제법 흘러버렸음을 뒤늦게 깨닫는 미욱한 자식의 마음으로 아버지의 해방일지를 읽었습니다.
아버지를 얼마나 이해하고 있는지 한번씩 생각할 때가 있습니다.
이제는 아버지의 아들로 아버지와 살아온 시간이 제법 쌓였음에도, 그 시간만큼 아버지를 알고 이해하고 있다고 당당하게 말할 수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지나온 시간을 되짚어보지 않더라도, 당장 하루 24시간 중에서 부모님과 이야기를 나누고, 부모님의 생활에 관심을 기울이고, 필요하신 건 없나, 편찮으신 데는 없는지, 오늘 기분은 괜찮으신지 살펴보고 말을 건네는 시간은 얼마나 될까요. 인사처럼 물어보고 때로 그날의 할 일을 다했다는 느낌으로 지나가지는 않았는지 되돌아 봅니다.
전쟁과 이념에서 자유로운 시대에 태어나, 아버지 세대가 이뤄낸 경제, 문화 발전의 혜택을
오롯이 누리고 사는 세대로 살아가고 있음에 감사합니다.
부모님의 아들로 태어난 것에 감사합니다.
부모님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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